개그맨 이창훈 근황+맹구 프로필 나이 결혼 가족 동생 배우 이미연 이혼 전영록 전 와이프

개그맨 이창훈 근황+맹구 프로필 나이 결혼 가족 동생 배우 이미연 이혼 전영록 전 와이프 본명 이봉남 출생 1955년 2월 19일(67세) 가족 여동생 이미연(1961년)

1955년 서울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 서라벌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라벌예술대학교 연극영화학과 중퇴 후 1975년 극단 ‘창조’에 입단하여 연극배우로 입문하였다. 이후 극단 ’76’, ‘마당’, ‘민중극단’, ‘광장’ 등을 전전하며 천 개의 얼굴과 멋진 목소리로 관객을 사로잡았고 1986년 서울연극연출가 그룹 최우수 연기상을 수상했다. 최양락이 대학로에서 관객 모독 한국 초연에 출연한 이창훈의 연기를 보고 많은 감동을 받았다고 한다. 초대 관객 모독 같은 작품은 연극계에 전설의 레전드로 전해진다.

이에 최양혁이 당시 유머 1번지, 한바탕 웃음으로 등을 연출하던 수많은 개그맨을 배출시킨 김은래 PD에게 이찬훈을 추천했다. 김은래 PD 또한 이창훈의 연기를 보고 (‘우리 가족은 아무도 못말려’라는 작품) 큰 감명을 받았고, 대학로 극장 앞 커피숍에서 매일같이 이창훈과 만나 “TV에 출연만 하면 당신은 꼭 스타가 될 수 있다, TV 출연만 허락하면 주변 연극인들도 TV에 출연시켜 부각시켜 주겠다” 등의 이야기를 해 이창훈을 설득했다고 한다.

결국 이창훈은 당시 경제 사정도 여의치 않았고, 무엇보다 자신뿐만 아니라 동료 연극인들도 함께 출연시켜 부각시킨다는 말에 TV 출연을 허락하며 브라운관에 데뷔하게 된다. 이때 최양락이 그 소식을 듣고 매우 기뻐하며 곧바로 이창훈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와 코미디를 가르쳤다고 한다. 물론 최양락이 이찬훈보다 훨씬 어렸고, 이찬훈은 최양락이 개그를 하기 전부터 계속 연극을 했던 사람이고 연극에서 재미있는 역할도 자주 했다고 하니 개그를 가르쳤다기보다는 TV방송에 맞는 개그 연기를 가르쳤다고 보는 게 맞을 것이다.

또한 연극 톤과 방송에서 사용하는 대사 톤이 달라 방송에 맞게 강약 조절을 해준 것으로 보인다. 같은 연기로 분류되지만 TV에서의 연기와 무대에서의 연기 방식에는 차이가 있다. 무대 연기는 조명과 동선의 관계성에 초점이 맞춰지지만 방송 연기는 카메라가 동선에 더 많은 영향을 미치고 관객이 있는 공연 계열의 방송 개그 콘트를 짜더라도 관객보다 카메라 워크를 고려해 마지막에 재미있는 감정선이 크게 되살아날 수 있도록 짜야 하기 때문에 쉽지 않다. 이창훈 입장에서 성공한 방송 개그맨에게 배울 것은 충분히 있었을 것이다. 연극에 종사하다가 브라운관에 데뷔해 연극 특유의 과장된 톤과 발성을 고치지 못해 곤궁해하는 경우가 꽤 많은데 대표적으로 데뷔 초기의 성동일이 있다.

조금만 과장하면 영구 심형래와 함께 한국 코미디계의 ‘맹구’라는 전설의 캐릭터를 이끌어낸 당사자답게 이후 1990년대 가장 유명한 개그맨으로 활동했지만 1999년 어머니의 병간호를 이유로 모든 TV 방송 활동을 완전히 중단한다. 실질적으로는 2001년 방영한 KBS 월화드라마 ‘미나’에 출연한 게 마지막이었다. 이후 2005년 본업이었던 연극 무대로 돌아와 현재는 연극 무대로만 활동하고 있다.

2005년 스타뉴스 인터뷰 기사를 통해 보면 TV나 개그맨으로서의 삶에 힘입어 나름대로 부를 축적했지만 그로 인해 자신이 가고자 했던 진로에 대한 고민과 이미지 타격으로 인한 고통이 컸기 때문인지 코미디 장르에 대해서는 완전히 인연을 끊고 살고 있다.

앞서 나온 대로 본인이 개그맨의 길을 선택한 결정적인 이유 중 동료 연극인들도 함께 출연시켜 인지도를 높여주겠다고 한 윗분들의 말을 믿고 코미디의 길로 들어섰지만 정작 본인만 승승장구하면서 연극계는 여전히 침체기에 있는 부조리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연극과 방송은 확실히 체계와 방식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방송국에서 출연시키고 싶어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방송은 적절히 애드리브도 하고 방송작가와 PD들이 그때그때 즉흥적으로 만들고 편집해서 만들어가는데 대본과 동선이 절대 어긋나서는 안 되는 연극과는 아무래도 너무 다르다. 이창훈처럼 개인의 역량이 크지 않은 이상 연극 배우들이 방송에 쉽게 적응하기는 어렵다.

KBS 코미디 40주년 특집 때도 임하룡, 최양락, 이봉원 등 원로 코미디언들이 출연했지만 이창훈은 등장하지 않았고 맹구 역은 김준호가 맡았다.

그럼에도 이창훈 자신은 맹구라는 캐릭터가 준 바보 캐릭터라는 캐릭터성에 대해서는 항상 긍정적으로 생각한다고 한다. 연극배우의 삶이 지금도 아르바이트와 병행하면서 하는 사람이 많은데 당시에는 더 심하고 배가 고팠다. 그런 면에서 방송, 행사, CF, 밤 무대 등에서 부를 축적하고 자신의 삶을 바꿔준 캐릭터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동생 이미연이 2020년 1월 11일자 SBS Plus <김수미의 밥은 먹고 있는가>에 출연하며 근황을 전했지만 지금은 연예계에서 은퇴해 비연예인의 삶을 살고 있다고 한다.

이창훈은 1990년 3월 KBS2 코미디 하이웨이 코너 ‘행복주식회사’에서 방송 데뷔를 했다. 1980년대 KBS에서 방영된 ‘흘렀던 옛사랑’, 아쉽게도 헤어진 사랑을 찾아주는 회사를 배경으로 한 코미디 드라마인데 원래 단막극이었지만 그가 출연하면서 미니시리즈 격으로 연장됐다.

참고로 이 코너는 ‘사랑을 찾아드립니다'(원제는 Finder of Lost Loves로 1984~85년까지 ABC에서 방송했다. 시즌1, 총 23화로 끝나 큰 인기를 얻지는 못했지만….)이라는 제목의 미국 드라마 설정과 주요 에피소드를 그대로 베낀 것이다. 더욱이 원작이 1987년 6월 19일부터 밤 10시 40분까지 KBS1 심야드라마 더빙 방송하였고, 1988년 3월 12일부터 8월 13일까지는 매주 일요일 오전 10시 20분에 KBS2 특별 재방송 드라마로 재방송하였기 때문에 불과 2년이 지났을 뿐 원작을 기억한 사람도 꽤 있었다.

이후 1990년 7월 유머 1번지 맨손 청춘 코너에서 목욕탕 관리사(때밀이)이달용이라는 수완 캐릭터로 출연한다. 달영 캐릭터는 바보 캐릭터이면서도 좀 특이한 면이 있어 갑자기 유식한 말을 그럴듯한 타이밍에 하기도 한다.

여기서 나는 짜장면이 너무 싫어. ‘나는 짬뽕, 나는 죽어도/목에 칼이 들어와도 리바이벌은 안 해!’라는 유행어와 바보짓을 한 뒤 상대가 보통 이마를 칠 정도의 타이밍에 손가락을 튕긴 뒤 양손으로 관자놀이를 하는 유행 동작으로 인기를 얻는다. 한 가지 더 말하자면 가수 민혜경의 미치광이 콘셉트도 있었다. 후렴 부분을 이상하게 따라 부르고 하면서 빠지는 느낌. 초대형 민해경 브로마이드를 가지고 있는데 가게 광고용 브로마이드를 몰래 가져가다가 들켜 죽을 뻔했다고… 이 코너에서 이창훈은 일약 스타 코미디언이 됐고 1990년 KBS 연예대상에서 코미디 신인상을 받는다.

1991년 5월 20일부터 한바탕 웃음에서의 ‘뽕숭아학당’ 코너에서 ‘이맹구’라는 캐릭터로 출연, 엄청난 인기를 끌며 이창훈은 대한민국 코미디계 역사에 하나의 방점을 찍는다. 이미지 관리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엉뚱한 표정 연기와 유연하면서도 곳곳에 꼬이는 몸을 활용한 개그 동작 하나하나에서 눈을 뗄 수 없는 철저한 바보 행태는 심형래의 영구마저 압도할 정도다.

주요 특기는 몸개그와 남에게 들은 이야기를 엉망으로 전달하는 것, 그리고 두 손으로 탈을 흉내낸 모양을 만들며 외치는 배트맨이었다. 배트맨은 선생님의 질문에 맥락 없이 배트맨이라고 외치는 것이다. 해당 코너에 배트맨이 등장했을 때는 1991년 6월 10일 방영분인데, ‘베토벤을 아는 사람’을 찾던 선생님(김형곤 분)에게 맹구가 운명교향곡이나 ‘배’자로 시작하는 것을 언급하다가 갑자기 “배트맨~”이라며 반전 개그를 날린 것이었다. 이것이 호응이 좋자 다음 방송에도 계속 사용하게 됐지만, 일부 회차에서는 몸에 충격을 받으면 배트맨을 외치게 된다는 설정으로 바뀌기도 했다. 한국에서 당시 영화 ‘배트맨’은 마침 봉숭아 학당이 시작되기 1년 전 개봉했지만 사실상 한국에서 슈퍼맨보다 늦게 개봉한 배트맨을 슈퍼맨과 동급 인기로 만든 것은 맹구다.

또 선생님 역 개그맨이 “대답해 볼 사람?”이라고 하면 학생들이 서로 손을 들어 대답을 하려는데 맹구가 “네네”라며 난리를 피워 결국 답변권을 얻는 것이 히트했다. 당시 초중고에서 너무 따라해서 수업에 차질이 생길 정도. 당시 SBS로 많은 선배들이 이적한 가운데 KBS의 자부심을 지켜낸 공이 컸다.

맹수 캐릭터와 유행어 개인기가 한꺼번에 다 나오는 엑기스 영상이다. 웃음보장(5분40초부터 9분10초까지)

그러나 이렇게 인기를 얻던 1992년 6월 10일 이창훈은 두 달 전부터 서울 청담동에 무허가 술집 ‘풀보’를 열고 접대부 10여명을 데리고 불법 심야영업을 했다는 이유로 수배를 받고 경찰에 구속됐다. 결국 7월 28일 징역 10월 및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풀려났다. 자제 기간 동안 구속 전 계약을 맺었던 어린이 영화를 촬영했다. 이후 연극계로 돌아갈까 했지만 어린이 팬들의 복귀 요청이 대단했을 정도로 최상위 인기를 얻고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주변에서 멈추고 결국 신인의 마음가짐으로 맹구 역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가 구속되기 전인 6월 8일 방영분에서는 동료 학동이 “아파서 참석하지 못했다”는 한 학동의 말에 수업 마지막까지 멍구는 나오지 않았고, 15일 방영분에서도 ‘결석’ 언급조차 없었다. 오는 6월 8일자 녹화를 앞둔 같은 달 4일 “갑자기 일이 생겨 방송국에 나갈 입장이 아니다”며 구속 전까지 잠적해버렸다.[6] 구속 후 봉황학당은 한동안 오서방 독주 체제로 가다가 정신을 차린 맹구가 귀환하던 중 머리를 부딪혀 바보가 된다는 설정으로 복귀했다.

이 사건으로 비난과 공백기도 있었지만 도저히 막을 수 없는 인기로 인해 1992년 KBS 코미디 대상을 수상하게 된다. 1993년 11월 8일을 끝으로 봉숭학당이 막을 내렸고 맹구 이창훈과 오서방 오재미는 희극인실에서 공로패를 받았다.

초대 봉숭아학당에서 진짜 끝난 후 그동안 최고였던 하회탈남희석이 제2대 맹구적인 역할을 맡았으나 이창훈을 따라가지 못하고 잊혀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2대 봉숭아학당은 불명예 종영되었다. 이후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심형섭이 개그콘서트로 봉숭학당을 재현해 제3대 맹구(=심맹구)가 됐지만 도저히 이창훈의 오리지널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심형섭의 경우는 이미 ‘사바나 추장 개그’로 히트한 직후 한 역할이라 충분히 인기가 있었고, 코믹 바보 연기의 거성 이창훈의 ‘호감형 바보 스타일’ 대신 심형섭 스타일의 ‘싱글벙글 바보 스타일’ 맹구를 재탄생시켰다는 평가도 받으며 나름 오래 버틴 편이다. 무엇보다 ‘원조’ 맹구 본인이 가장 가깝다고 인정했다.

한편 이창훈은 1990년부터 달영이나 맹구 캐릭터로 어린이 영화나 비디오 영화에도 자주 출연했는데, 이 어린이 영화는 지금 보면 표절 및 매드 비디오에 가까운 썸마이한 작품이다. 첫 어린이 영화 출연작 짬뽕 홍길동을 비롯해 <맹구와 북두신검(극장영화)>이라든가, <맹구짱구 스트리트파이어(비디오영화)>라든가… 어린이 영화배우로 이창훈을 주로 기용한 것은 왕룽이다. 남기남이 영구를 쓰는 만큼 나는 맹구를 부리는 드래곤볼의 어린 오공의 머리를 재현할 당시 아역배우 허성태처럼 왕룽 영화에 자주 나올 정도는 아니지만 왕룽의 필모그래피를 감안하면 명예왕룡사단 수준에서 이창훈을 굴렸음을 알 수 있다.

전성기 코미디상 시상식 등에서 분장하지 않은 이창훈의 모습을 보면 의외로 고전적인 꽃미남상에 목소리도 성우저리라고 할 정도로 중후한 톤이고 바보 연기만큼 진지한 역할도 어울리는 희극인이다. 하지만 달영과 맹구 캐릭터가 워낙 강렬해 이후 그가 잡게 될 역, 특히 진지한 역의 배역을 맡을 때마다 “어울리지 않는다”는 혹평을 듣게 되면서 방송에서 설 자리를 점점 잃어간다.

그러다 결국 자신이 만들어낸 맹구라는 캐릭터의 후광을 극복하지 못한 채 방송 활동을 접고 만다. 특정 캐릭터가 대박을 터뜨리고 그 후광 이후 배우/가수 경력에 악영향을 주는 사례는 부지기수지만 <드라큘라>의 벨라루스, <슈퍼맨>의 조지 리브스, <신나는 장난꾸러기>의 다나 플루토, <야, 꼼레야>의 ‘마영달’로 유명한 이성웅 등이 있다.

상술한 시피 이창훈은 본래 방송보다는 무대 공연, 즉 연극에 애착이 큰 사람이어서 양극 연기에 대한 갈망이 매우 컸고 맹구를 그만둔 이유도 양극 연기와 췌장암에 걸린 노모의 간병 때문이었다고 한다. 방송 활동을 중단한 후에는 많은 연극 무대에 참여해 왔으며, 노모가 병에 걸려 누우면 모든 사회 활동을 포기하고 산을 돌아다니며 약초를 캐내어 어머니에게 바쳤다고 한다.

거의 10년 가까이 맹구 때문에 고생했는데 본인도 맹구가 이렇게 오래 갈 줄은 몰랐던 것 같다. 실제 공수부대 예비역 중령 출신인 이창훈은 동작을 멈추고 하사 계급에 녹색 견장을 차고 신임 분대장으로 출연했다. 김정식 병장의 후임 분대장이자 중사인 김진호 부소대장의 부하. 그런데 여기서 아주 제대로 된 사람으로 나오자 괴리감을 느낀 시청자들이 굉장히 많았다.

위 사진을 봐도 알겠지만 맹구 분장을 하지 않은 인간 이창훈 씨는 지금 이미지로 봐도 훈훈한 미 중년, 미노년의 인상에 목소리도 상당히 남자다운 중저음 톤에 고급스러운 어조를 가졌다. 이 역은 각각 개성적인 원내대표에 비해 한 명만 제대로 돼 오히려 이상한 역할이었다. 덕분에 에피소드 리뷰로 갈수록 분대장 이하사의 말투가 맹구처럼 모호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밖에 KBS 어린이 드라마 누룽지선생과 감자 7개에도 출연하기도 했으며 코미디 하이웨이에서는 암행어사역이나 신혼부역을 맡기도 했다. 1996년 12월 7일 SBS 웃으며 삽시다에 출연했다. 하지만 모두 똑똑한 달룡에게 괴리감을 느낀 시청자들에게는 역시 혹평 일색이었다. 결국 ‘웃음은 행복을 싣고’나 ‘고전해학극장’ 등에서 맹구와 비슷한 특징을 가진 캐릭터를 맡았다.

나중에는 이런 이미지를 역이용해 하버드라는 학생들을 위한 책상과 의자 광고까지 등장할 정도. 아주 제대로 된 이창훈 씨가 상품 소개를 한다. 그리고 어린 목소리(의 성우)로 “에이~ 분위기 너무 만들어~!” 하면 특유의 맹구 표정으로 “하버드니까.”라고 광고를 마무리하지만 표정은 틀림없는 맹구인데도 목소리는 여전히 제대로 된 이창훈의 목소리임이 압권(…). 당시 광고집

방송 생활 말년에 KBS에서 방영한 코미디 특집 기획 ‘도망자’에서도 매우 진지한 역할을 맡았다. 이 작품은 동명의 1963년작 미국 드라마나 2010년작 드라마 ‘도망자 Plan’. B와는 무관한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1969년 김종래 원작 만화를 영상화한 작품이다. 의원 윤태호(이창훈 분)가 억울한 살인 누명을 쓴 채 포도대장(김정식 분)에게 쫓기는 한편 유일한 사건의 단서인 목점의 여자를 찾는, 그야말로 쫓아가 쫓기는 한국형 스릴러였다. 원작 만화는 2003년 애장판으로도 출간된 바 있다. 이 작품의 분위기 자체가 코미디치고는 상당히 어둡고 진지하긴 했다. 밥알로 유명했던 김정식을 비롯해 개그맨들의 양극 연기가 돋보인 작품.

2004년경부터 이미 금연 상태였으나 2009년 폐암 수술 후 2014년경 완치 판정을 받아 암을 극복하고 연극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병상에서 일어선 직후에는 김태희, 양동근 주연의 영화 그랑프리에도 우정 출연하기도 했지만 맹구의 모습을 보인 것이 아니라 자칭 ‘경마 전문가’로 말뿐인 개그 캐릭터로 나왔다. 얼굴을 보고 “어?맹구?”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던 관객이 스탭롤에 오르는 것을 보고 역시!!! 했다는데…

1991년 5월 20일부터 한바탕 웃음에서의 ‘뽕숭아학당’ 코너에서 ‘이맹구’라는 캐릭터로 출연, 엄청난 인기를 끌며 이창훈은 대한민국 코미디계 역사에 하나의 방점을 찍는다. 이미지 관리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엉뚱한 표정 연기와 유연하면서도 곳곳에 꼬이는 몸을 활용한 개그 동작 하나하나에서 눈을 뗄 수 없는 철저한 바보 행태는 심형래의 영구마저 압도할 정도다.

주요 특기는 몸개그와 남에게 들은 이야기를 엉망으로 전달하는 것, 그리고 두 손으로 탈을 흉내낸 모양을 만들며 외치는 배트맨이었다. 배트맨은 선생님의 질문에 맥락 없이 배트맨이라고 외치는 것이다. 해당 코너에 배트맨이 등장했을 때는 1991년 6월 10일 방영분인데, ‘베토벤을 아는 사람’을 찾던 선생님(김형곤 분)에게 맹구가 운명교향곡이나 ‘배’자로 시작하는 것을 언급하다가 갑자기 “배트맨~”이라며 반전 개그를 날린 것이었다. 이것이 호응이 좋자 다음 방송에도 계속 사용하게 됐지만, 일부 회차에서는 몸에 충격을 받으면 배트맨을 외치게 된다는 설정으로 바뀌기도 했다. 한국에서 당시 영화 ‘배트맨’은 마침 봉숭아 학당이 시작되기 1년 전 개봉했지만 사실상 한국에서 슈퍼맨보다 늦게 개봉한 배트맨을 슈퍼맨과 동급 인기로 만든 것은 맹구다.

또 선생님 역 개그맨이 “대답해 볼 사람?”이라고 하면 학생들이 서로 손을 들어 대답을 하려는데 맹구가 “네네”라며 난리를 피워 결국 답변권을 얻는 것이 히트했다. 당시 초중고에서 너무 따라해서 수업에 차질이 생길 정도. 당시 SBS로 많은 선배들이 이적한 가운데 KBS의 자부심을 지켜낸 공이 컸다.

맹수 캐릭터와 유행어 개인기가 한꺼번에 다 나오는 엑기스 영상이다. 웃음보장(5분40초부터 9분10초까지)

그러나 이렇게 인기를 얻던 1992년 6월 10일 이창훈은 두 달 전부터 서울 청담동에 무허가 술집 ‘풀보’를 열고 접대부 10여명을 데리고 불법 심야영업을 했다는 이유로 수배를 받고 경찰에 구속됐다. 결국 7월 28일 징역 10월 및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고 풀려났다. 자제 기간 동안 구속 전 계약을 맺었던 어린이 영화를 촬영했다. 이후 연극계로 돌아갈까 했지만 어린이 팬들의 복귀 요청이 대단했을 정도로 최상위 인기를 얻고 있었기 때문에 당연히 주변에서 멈추고 결국 신인의 마음가짐으로 맹구 역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가 구속되기 전인 6월 8일 방영분에서는 동료 학동이 “아파서 참석하지 못했다”는 한 학동의 말에 수업 마지막까지 멍구는 나오지 않았고, 15일 방영분에서도 ‘결석’ 언급조차 없었다. 오는 6월 8일자 녹화를 앞둔 같은 달 4일 “갑자기 일이 생겨 방송국에 나갈 입장이 아니다”며 구속 전까지 잠적해버렸다.[6] 구속 후 봉황학당은 한동안 오서방 독주 체제로 가다가 정신을 차린 맹구가 귀환하던 중 머리를 부딪혀 바보가 된다는 설정으로 복귀했다.

이 사건으로 비난과 공백기도 있었지만 도저히 막을 수 없는 인기로 인해 1992년 KBS 코미디 대상을 수상하게 된다. 1993년 11월 8일을 끝으로 봉숭학당이 막을 내렸고 맹구 이창훈과 오서방 오재미는 희극인실에서 공로패를 받았다.

초대 봉숭아학당에서 진짜 끝난 후 그동안 최고였던 하회탈남희석이 제2대 맹구적인 역할을 맡았으나 이창훈을 따라가지 못하고 잊혀졌고 얼마 지나지 않아 2대 봉숭아학당은 불명예 종영되었다. 이후 오랜 세월이 흐른 뒤 심형섭이 개그콘서트로 봉숭학당을 재현해 제3대 맹구(=심맹구)가 됐지만 도저히 이창훈의 오리지널을 따라잡을 수 없었다.

그럼에도 심형섭의 경우는 이미 ‘사바나 추장 개그’로 히트한 직후 한 역할이라 충분히 인기가 있었고, 코믹 바보 연기의 거성 이창훈의 ‘호감형 바보 스타일’ 대신 심형섭 스타일의 ‘싱글벙글 바보 스타일’ 맹구를 재탄생시켰다는 평가도 받으며 나름 오래 버틴 편이다. 무엇보다 ‘원조’ 맹구 본인이 가장 가깝다고 인정했다.

한편 이창훈은 1990년부터 달영이나 맹구 캐릭터로 어린이 영화나 비디오 영화에도 자주 출연했는데, 이 어린이 영화는 지금 보면 표절 및 매드 비디오에 가까운 썸마이한 작품이다. 첫 어린이 영화 출연작 짬뽕 홍길동을 비롯해 <맹구와 북두신검(극장영화)>이라든가, <맹구짱구 스트리트파이어(비디오영화)>라든가… 어린이 영화배우로 이창훈을 주로 기용한 것은 왕룽이다. 남기남이 영구를 쓰는 만큼 나는 맹구를 부리는 드래곤볼의 어린 오공의 머리를 재현할 당시 아역배우 허성태처럼 왕룽 영화에 자주 나올 정도는 아니지만 왕룽의 필모그래피를 감안하면 명예왕룡사단 수준에서 이창훈을 굴렸음을 알 수 있다.

전성기 코미디상 시상식 등에서 분장하지 않은 이창훈의 모습을 보면 의외로 고전적인 꽃미남상에 목소리도 성우저리라고 할 정도로 중후한 톤이고 바보 연기만큼 진지한 역할도 어울리는 희극인이다. 하지만 달영과 맹구 캐릭터가 워낙 강렬해 이후 그가 잡게 될 역, 특히 진지한 역의 배역을 맡을 때마다 “어울리지 않는다”는 혹평을 듣게 되면서 방송에서 설 자리를 점점 잃어간다.

그러다 결국 자신이 만들어낸 맹구라는 캐릭터의 후광을 극복하지 못한 채 방송 활동을 접고 만다. 특정 캐릭터가 대박을 터뜨리고 그 후광 이후 배우/가수 경력에 악영향을 주는 사례는 부지기수지만 <드라큘라>의 벨라루스, <슈퍼맨>의 조지 리브스, <신나는 장난꾸러기>의 다나 플루토, <야, 꼼레야>의 ‘마영달’로 유명한 이성웅 등이 있다.

상술한 시피 이창훈은 본래 방송보다는 무대 공연, 즉 연극에 애착이 큰 사람이어서 양극 연기에 대한 갈망이 매우 컸고 맹구를 그만둔 이유도 양극 연기와 췌장암에 걸린 노모의 간병 때문이었다고 한다. 방송 활동을 중단한 후에는 많은 연극 무대에 참여해 왔으며, 노모가 병에 걸려 누우면 모든 사회 활동을 포기하고 산을 돌아다니며 약초를 캐내어 어머니에게 바쳤다고 한다.

거의 10년 가까이 맹구 때문에 고생했는데 본인도 맹구가 이렇게 오래 갈 줄은 몰랐던 것 같다. 실제 공수부대 예비역 중령 출신인 이창훈은 동작을 멈추고 하사 계급에 녹색 견장을 차고 신임 분대장으로 출연했다. 김정식 병장의 후임 분대장이자 중사인 김진호 부소대장의 부하. 그런데 여기서 아주 제대로 된 사람으로 나오자 괴리감을 느낀 시청자들이 굉장히 많았다.

위 사진을 봐도 알겠지만 맹구 분장을 하지 않은 인간 이창훈 씨는 지금 이미지로 봐도 훈훈한 미 중년, 미노년의 인상에 목소리도 상당히 남자다운 중저음 톤에 고급스러운 어조를 가졌다. 이 역은 각각 개성적인 원내대표에 비해 한 명만 제대로 돼 오히려 이상한 역할이었다. 덕분에 에피소드 리뷰로 갈수록 분대장 이하사의 말투가 맹구처럼 모호해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 밖에 KBS 어린이 드라마 누룽지선생과 감자 7개에도 출연하기도 했으며 코미디 하이웨이에서는 암행어사역이나 신혼부역을 맡기도 했다. 1996년 12월 7일 SBS 웃으며 삽시다에 출연했다. 하지만 모두 똑똑한 달룡에게 괴리감을 느낀 시청자들에게는 역시 혹평 일색이었다. 결국 ‘웃음은 행복을 싣고’나 ‘고전해학극장’ 등에서 맹구와 비슷한 특징을 가진 캐릭터를 맡았다.

나중에는 이런 이미지를 역이용해 하버드라는 학생들을 위한 책상과 의자 광고까지 등장할 정도. 아주 제대로 된 이창훈 씨가 상품 소개를 한다. 그리고 어린 목소리(의 성우)로 “에이~ 분위기 너무 만들어~!” 하면 특유의 맹구 표정으로 “하버드니까.”라고 광고를 마무리하지만 표정은 틀림없는 맹구인데도 목소리는 여전히 제대로 된 이창훈의 목소리임이 압권(…). 당시 광고집

방송 생활 말년에 KBS에서 방영한 코미디 특집 기획 ‘도망자’에서도 매우 진지한 역할을 맡았다. 이 작품은 동명의 1963년작 미국 드라마나 2010년작 드라마 ‘도망자 Plan’. B와는 무관한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1969년 김종래 원작 만화를 영상화한 작품이다. 의원 윤태호(이창훈 분)가 억울한 살인 누명을 쓴 채 포도대장(김정식 분)에게 쫓기는 한편 유일한 사건의 단서인 목점의 여자를 찾는, 그야말로 쫓아가 쫓기는 한국형 스릴러였다. 원작 만화는 2003년 애장판으로도 출간된 바 있다. 이 작품의 분위기 자체가 코미디치고는 상당히 어둡고 진지하긴 했다. 밥알로 유명했던 김정식을 비롯해 개그맨들의 양극 연기가 돋보인 작품.

2004년경부터 이미 금연 상태였으나 2009년 폐암 수술 후 2014년경 완치 판정을 받아 암을 극복하고 연극생활을 이어가고 있다. 병상에서 일어선 직후에는 김태희, 양동근 주연의 영화 그랑프리에도 우정 출연하기도 했지만 맹구의 모습을 보인 것이 아니라 자칭 ‘경마 전문가’로 말뿐인 개그 캐릭터로 나왔다. 얼굴을 보고 “어?맹구?”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던 관객이 스탭롤에 오르는 것을 보고 역시!!! 했다는데…

배우 이미연이 이창훈의 여동생이지만 전영록과 결혼해 이혼했다. 이창훈은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이들인 정보람 정우람 등 외삼촌이 된다.

1992년 2월 3일 KBS2 웃음으로 ‘뽕숭아학당’에 맹구 이창훈과 이미영 남매가 동반 출연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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