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학의 향기] ‘고위험’ 고혈압 환자 기준 강화, 무엇이 달라질까?

성인 10명 중 4명꼴로 전 세계 많은 사람이 매일 하는 숙제가 있다. 혈압약을 먹는 것이다. 대표적인 성인병 질환 중 하나인 고혈압은 침묵의 살인자라는 별명을 갖고 있다. 이 별명에서 암시하듯 고혈압은 환자 스스로 증상을 자각하기 어렵다. 게다가 주변에 고혈압 진단을 받은 사람이 워낙 많아 환자 입장에서 질병의 심각성을 잊기 쉽다. 하지만 이 질환은 매일 약을 복용하면서 꾸준히 치료하고 관리해주지 않으면 매우 심각한 결과를 일으킨다.

‘질병’으로서의 고혈압은 비교적 최근의 시작 고혈압은 혈압이 정상 범위보다 높을 때 진단된다. 그러니까 20세기 초 혈액순환에 대한 지식이 충분히 축적됐고 혈압측정기기가 세상에 나오기 전까지 혈압 문제는 질병으로 인식조차 되지 않았다는 뜻이다. 고혈압과 수명, 기타 합병증과의 밀접한 연관성이 알려지면서 치료제인 혈압강하제가 처음 도입된 것은 2차 세계대전 이후인 20세기 중반이다. 고혈압에 흔히 동반되는 질병인 당뇨병의 독특한 증상이 기원전 300년경의 기록에도 남아 있는 것에 비하면 질병으로서 고혈압의 시작은 비교적 최근이다.

그림1. ‘고혈압’이 질병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은 혈압측정기기가 발명되면서부터다.(출처: shutterstock)

흥미롭게도 고혈압이라는 개념이 탄생한 이후 길지 않은 역사 속에서 이 질병의 발병 빈도는 계속 증가하고 있다. 특정 질환에 대해 더 연구할수록 환자 수가 줄어들기 쉬운데 과연 무슨 일일까.

일반적으로 고혈압 환자 증가 원인으로는 인구 고령화를 비롯해 스트레스, 짜고 자극적인 식욕의 식생활, 운동 부족, 흡연 및 음주 등의 위험인자가 꼽힌다. 고혈압 발병 원인으로 거론되는 것 중 유전을 제외했을 때 대부분의 위험인자가 생활습관이나 환경과 관련된다는 점에서 갈수록 고혈압 유병률이 높아지는 것은 당연할 수 있다.

하지만 이 밖에 발병 빈도에 영향을 주는 또 다른 원인이 있다. 바로 고혈압 기준이 계속 바뀌었다는 사실이다. 일반적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정상 혈압 범위를 120/80mmHg 미만으로 보고 수축기 혈압이 140mmHg 이상이거나 확장기 혈압이 90mmHg 이상이면 고혈압으로 진단한다. 그에 비해 20세기 중후반 고혈압 진단의 최초 기준은 160/95mmHg이었다. 이처럼 기준이 점점 엄격해지면서 자연스럽게 고혈압 환자 수는 점차 증가했다.

더 많아지는 고혈압 환자의 역사적으로 고혈압 진단 기준치는 계속 낮아졌다. 특히 2017년 미국 심장학계에서 발표한 가이드라인은 의미심장했다. 과거 정상혈압을 120/80mmHg, 고혈압 전 단계에서 120~139/80~99mmHg, 고혈압 진단 경계치로 140/90mmHg 이상으로 분류한 것과 달리 새 가이드라인에서는 고혈압 전 단계를 ‘상승혈압'(120~129/80mmHg)과 ‘고혈압 1단계'(130~139/80~89mmHg) 두 구간으로 세분화했다. 또 기존 고혈압 기준을 고혈압 2단계라는 명칭으로 바꿨다. 정리하면 고혈압 1단계를 도입함으로써 기존의 140/90mmHg보다 낮은 130/80mmHg 이상에서 고혈압으로 정의하게 된 것이다.

이처럼 미국 학계가 더 엄격한 기준을 세운 것은 고혈압을 보다 조기에 진단하고 초기부터 더 적극적으로 치료 및 예방하겠다는 학계의 의지가 반영된 결과였다. 과거 분류상 고혈압 전단계 후반에 접어들면 정상혈압과 비교했을 때 이미 심혈관질환 위험이 2배 증가하는 등 유의미한 차이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2018년 한국 의료계는 미국의 새로운 가이드라인을 따르지 않고 기존에 사용하던 기준을 고수하기로 결정했다. 첫째, 치료효과 측면에서 140/90mmHg 기준의 근거가 130/80mmHg 기준보다 과학적으로 더 견고하고 둘째, 새로운 기준을 적용할 경우 고혈압 유병률이 급격히 증가함에 따라 사회적 부담이 커지기 때문이었다. 대한고혈압학회에 따르면 새 기준을 적용할 경우 우리나라 성인 중 고혈압 환자 비율이 32.0%에서 50.5%로 급증할 것으로 예상됐다.

2022년 고혈압 지침 개정안, 그런데 과거 보수적인 태도를 견지하던 대한고혈압학회가 변화를 택했다. 최근 발표된 2022년 지침에 따르면 새로운 고혈압 관리 기준은 고위험 환자군을 중심으로 심각한 고혈압 환자 기준을 보다 폭넓게 적용하는 방향으로 개정됐다.

<표. 2022년 고혈압 지침 개정안> (출처 : 대한고혈압학회)

기존에 일반적인 경계인 140/90mmHg가 아닌 130/80mmHg 미만에서 예외적인 관리가 권장됐던 환자군은 ‘고혈압 환자 중 당뇨병과 심뇌혈관질환이 동반된 경우’뿐이었다. 하지만 새 지침에서는 심뇌혈관질환을 앓지 않아도 무증상 장기손상, 만성콩팥병 3기 이상 등 ‘고위험 당뇨병 환자’에 속하는 경우 130/80mmHg 관리기준을 적용하기로 했다. 또 대한고혈압학회는 고혈압이 아닌 경우에도 최소 1, 2년마다 혈압을 측정해 조기에 혈압질환을 진단하도록 권고함으로써 조기 진단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사실 개정에 앞서 실제 진료 현장에서는 혈압 수치 기준으로 봤을 때 환자가 고혈압 전 단계에서도 동반된 질병을 종합적으로 고려해 고혈압 진단 환자에 준하는 조치를 이미 시행해왔다. 따라서 이번 지침 발표 이후 환자가 체감하는 변화는 크지 않을 것으로 관측된다. 다만 이번 개정 후 향방을 감안할 때 우리나라에서도 고혈압 진단 장벽은 앞으로 더 낮아질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결국 모든 전문가가 입을 모아 말하는 것은 고혈압 예방, 조기 진단, 그리고 관리의 중요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하지 않다는 것이다. 때문에 무엇보다 환자 스스로의 적극적인 건강관리가 최근 흐름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지음 : 정유희 과학칼럼니스트 / 일러스트 : 이명헌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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