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상징과 꿈의 언어 <상징과 꿈의 해석>, How to read 융 /

상징과 꿈의 언어 <상징과 꿈의 해석> <융은 과학의 시대에 영혼을 추구하고 있었고, 그의 시대는 그의 염원에 친절하게 반응하지 않았다. 우리 시대에는 그에게 더 동정적이지만, 그 이유는 우리가 과학적이고 현대적인 많은 가정이 의문시되고 의심받거나 역전되고 있는 탈근대주의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토토: 바쁜 현대를 사는 인간은 고대 그리스 철학에서 프로이트 융의 심리학을 배워야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까? 오히려 그런 것보다. 스스로 놓여 있는 개개인의 독립적이고 독특한 삶에서 스스로 어떤 철학을 이끌어낼 수 있어야 하는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방법이 필요한 것 같다. 항상 시간과 여유가 큰 장애물로 작용한다. <융은 정신의 깊이를 드러내며 신성하고 정령 같은 정신의 영역을 드러내기 위해 풍부하고 다채로운 색감으로 정신을 그리려고 노력했다. 정신에 질료를 주기 위해 그는 비록 수세기에 걸쳐 낡은 개념이지만 고대 종교로부터 영혼, 정신, 아니마(anima), 아니무스(animus)와 같은 개념을 빌렸다. 무엇보다 그는 정신을 현대적 종교 체험의 현장으로 신화화했다.> <기호란 명백하고 겉으로 드러나는 것이며 이성에 의해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상징은 신비롭고 직관이나 시적 이해를 통해서만 식별할 수 있다. 윤이 관심을 가졌던 것은 상징적인 지식이고, 그는 깊고, 심원하며, 알려지지 않은 것에 매혹을 느낀다.><기호연구는 기호학, 언어학과 이야기를 중심으로 한 분석으로 이끈다. 상징에 관한 연구는 신화학, 종교, 철학으로 이끌어 간다.>토토: 그렇다면 내가 관심을 갖는 것은 상징적인 것이다. 상징적이기는 하지만 주관적이기 때문에 분석할 수 없지 않을까? 그것을 해석하는 것은 오직 그 상징을 만들어낸 사람들의 마음에서만 가능하지 않을까. 그러나 주관적인 것을 객관화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다만 모두가 같은 상징을 나타내는 순간 그것은 이미 ‘상징’이 아니라 ‘기호’가 되어 버리는 것은 아닐까? 시를 이해할 때 ‘기호’로서 그 내용을 이해하는 것(시적 이해)은 정신을 이해하는 최선의 방법이 아니다. 시는 상징으로서 작가의 마음 상태를 가정해 보는 독자의 주관적 마음에 달려 있다. 정확히 시의 해석이 작가가 의도한 것과 완전히 다르더라도 그것은 시의 목적성에 부합하는 것이다. 위의 상징을 해석하는 방법 가운데 (무의식을) 신화학 종교 철학은 어떻게 독자의 주관성을 허용하는지 궁금하다.<프로이트와 달리 융은 꿈을 주관 단계에서, 즉 꿈이 내면의 대상과 내면의 인물을 언급하는 것으로 해석했다. 꿈은 낮세계에 대한 논평이나 검열된 형태의 아동기 드라마 재연이 아니라 내적 현실의 자기표현이다. 만약 우리가 상징적 인물과 신화적 어려움이 거주하는 내적 공간 innerspace)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한다면 우리는 이미 융처럼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는 이를 내향적(introrerted) 사고라고 언급했다. 반면 프로이트의 사고는 일차적으로 외향적(extraverted) 사고이며 외부 세계의 대상이나 사람을 향한다. 프로이트는 내면의 현실을 탐구했는데 종종 내면의 대상을 외부의 대상이 환상적으로 반영되어 있다고 보는 외향적 시각을 가지고 탐색했다> 토토:그렇다면 프로이트의 입장은 꿈은 현실의 반영이고 융의 입장은 꿈은 현실과 동떨어진 또 다른 자아의 상징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프로이트는 꿈을 분석해 현실 상태를 이해할 수 있지만 융은 꿈의 상징을 분석한다고 해도 현실 상태를 알 수 없다. 대신 융은 꿈의 상징은 어떤 현실과 완전히 동떨어진 세상을 보장한다?! 라는 것일까. *밑에 맞대!<천성적으로 내성적인 사람이 아닌 한 융과 같은 관점에서 생각하기 위해 노력과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은 지극히 정상적인 일이다. 예를 들어 한 가지 예를 들면 융단 환자는 꿈에서 깨어나 그 꿈이 아무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술에 취한 얕은 여자는 현실의 그의 아내와 맞지 않는다. 그는 꿈이 자신을 속이고 있다는 것, 그리고 그 꿈은 마음의 속임수라고 느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약 그가 자신의 지각을 바꿀 수 있다면, 그리고 그 여자가 자신의 미지의 어떤 측면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면 그는 심리학적으로나 치료적으로나 생각하고 있을 것이다. 융에 따르면 이런 변동이 일어나자마자 우리는 꿈의 사유 방식에 접근해 꿈에서 배우기 시작하는 것이다.>토토: 융의 꿈 상징 논리를 따라가면 우리는 꿈에서 나오는 상징을 어떤 현실 증상에 대한 해석 도구로 사용하는 것은 무리다. 대신 꿈의 상징은 현실과 전혀 다르기 때문에 개인 주관의 해석에 따라 이렇게도 그렇게도 (자유롭게) 해석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융은 꿈의 해석을 치료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고 한다. 프로이트 꿈의 상징 해석은 이미 정해진 (객관화된) 법칙에 따를 수밖에 없다. <인용문에 나와 있는 자유연상에 대한 융의 글은 환자가 꿈의 이미지와 활동에 대해 ‘자유롭게 연상하는’ 프로이트 학파의 꿈 해석 방식에 대한 공격이다. 융에게 이러한 접근은 옳지 않은 것이었는데, 그 이유는 그런 방식이 우리를 꿈의 내용에서 멀어지게 하기 때문이다. 융은 항상 제자들에게 그 이미지를 떠나지 말라고 했다. >토토 : 그렇다고 개인의 자유로운 해석을 허락한 것은 아니다. <꿈은 정신의 계시이며, 그 의미는 개인적인 기억이나 어린 시절의 역사적 자료를 활성화시킴으로써 규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심층에서 나오는 초개인적인(ranspersonal) 메시지이며 우리는 그것에 대해 겸손한 자세를 취해야 한다. 융은 꿈에 대해 놀라움과 놀라움으로 접근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우리는 그것이 유쾌한 사실이든 불쾌한 사실이든 우리에게 알려지게 된 것을 통찰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토토: 그 사실을 누가 해석, 정의해서 알려줄 것인가?<융의 꿈 해석 방법은 자유연상이 아니라 임상수련 과정에서 애널리스트에 의해 발달하는 기술인 확충(amplification)이다. 그 목표는 꿈의 이미지를 신화 및 세계 각지의 종교, 문헌과 우주론과 연결시킴으로써 꿈의 이미지를 보다 상세하게 만드는 것이다. 꿈을 환자의 개인사와 연결시키는 대신 융은 꿈을 인류의 보편적 역사, 어느 시대, 한 문화권에 나와 있는 지혜를 간직한 상징체계와 연결시키려고 시도한다.>토토: 그렇다면 융 역시 어떤 프로이트와 같은 과학적, 객관적 체계의 해석 방법이 있다고 한다. 다만 그 체계는 개인사가 아니라 더 넓은 범주의 보편성과 객관성에 의존한다. 어쩌면 이런 정신분석이 갖는 학문의 한계성일 수밖에 없다. 주관성은 심리학과 같은 과학적 학문이 될 수 없다. 소설이나 시처럼 문학이 될 뿐 <이러한 우주적 힘에 대한 견고한 경험적 토대는 없지만 문학, 신화학, 그리고 예술의 직관적 전통은 영적 지식의 중요한 기반이다. 융은 그 어느 때보다 오늘의 개인적인 꿈이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일찍이 서구의 남녀는 신화와 종교에 참여함으로써 무의식에 대한 우주적 상징융은 그것을 집단적 무의식이라고 불렀던 __에 가까워졌다. 우리는 의례와 의식, 그리고 공유하고 있는 환상과 이야기를 통해 현실의 중심부로 들어갔다. 그러나 이 시대에 우리가 점점 합리적이고 지성적이 되면서 이런 의미의 보고는 말라버렸다.융에 따르면 우리는 많은 정보를 축적했지만 삶의 의미를 거의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인류의 진보는 의심받아 왔다.>토토: 그렇다면 윤이 제안하는 인간의 꿈 해석은 문학, 신화, 예술이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뜻이다. 과학의 시대는 오래전에 도래했고 과학이 모든 것을 밝히려던 초기의 위엄이 사라지고 있을 때 인간은 다시 신화 문학 예술 같은 상징이 중요해졌다는 얘기다. 나의 경우에도 나만의 신화나 (우주)세계를 문학으로 꿈꾼다. 그 이유는 현실 어디에도 내가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도록 발 디딜 틈이 없다는 위기감에서다. 우리의 지식은 풍부해졌지만 지혜에 있어서는 가난하다. 고대인들이 보다 환상적인 사고에 가까운 사고방식을 선호한 반면 우리 관심의 중심은 물질적인 측면으로 전환됐다. 고전적인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모든 것이 아직도 신화에 젖어 있었다. <전집> 제5권, 23절> <이성은 신화를 단지 과학의 좋지 않은 변형이거나 유아적인 변형에 불과하다고 가정한다.>토토 : 뮤토스를 간지 로고스의 전 단계로 받아들이는 것은 아마도 철학의 역사도 선형적으로 배우려는 태도 때문이기도 하다. 예술에서 추상화가 근대에 와서 호응을 얻었듯이 과학시대 다음은 다시 신화의 시대가 될지도 모른다.<우리는 근원적인 신화 양식, 즉 ‘고대인의 환상적 사유’를 회복해야 하며, 그래야 우리 삶을 우주적인 힘과 다시 연결시킬 수 있다. 융에게 건강이란 자아의 소외를 극복하는 것과 같은 의미이며? 오직 상징적인 언어만이 이제는 자아가 볼 수도 이해할 수도 없는 힘이지만 과거 자아가 연결되어 있던 힘이라는 사실을 전달할 수 있다.>토토 : 건강은 예술적 삶을 회복하는 것, 자아를 이성적 사고로 발견하는 데 한계가 존재한다. 우리의 정신을 과학적 생물학적 논리만으로 설명할 수는 없다. <과학이 은유에 찬 융의 언어와 상징적 사고를 인정하는 데 실패하고 있는 상황에서 융의 견해의 타당성을 주장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이러한 융에 대한 오해로 인해 생기는 유해한 영향을 줄이는 한 방법은 그의 원형적인 인물이 가지고 있는 획일적이거나 정체된 성질을 깨뜨려 버리고 그것을 과정(processes)으로, 즉 명사보다 동사로 취급하는 것이다. 예컨대 자아나 그림자를 고정 불변의 실체로 개념화하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는 정신적 과정을 가리키는 유동적 은유로 개념화하는 것이다.>토토: 이러한 상징성은 누군가를 설득시키기 위해서는 많은 어려움에 직면한다. 그래서 차라이그(신화, 예술적) 원형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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